'세상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3.02.05 故 하용조 목사님을 추모하며 by illbegoodtree
  2. 2013.02.05 빈 라덴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 by illbegoodtree
  3. 2012.07.11 총살 직전 "주여"라고 외쳤던 북한의 형제 by illbegoodtree
  4. 2012.06.23 로렌 커닝햄 목사,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by illbegoodtree
  5. 2011.10.15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by illbegoodtree

故 하용조 목사님을 추모하며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3.02.05 03:16


하용조 목사 (출처: 네이트 지식)



존 스토트 목사님에 이어 하용조 목사님께서 결국 2011년 8월 2일 예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사실 저는 하용조 목사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을 뿐더러, 그 분을 알게 된 것도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요. 그런데, 그 분의 설교를 처음 들었을 때 도무지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을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설교 화법이 특이하다거나 설교 내용이 다른 목사님과 특별히 다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정,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 그 마음 속에 내재된 평화.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저는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해를 아이팟으로 듣고 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오래동안 간암 등 지병을 앓으며 투병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육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기쁘고 즐겁게 여기셨습니다. 목사님에게 그런 병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바쁘다는 것과 피곤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것을 할땐 신이나지요. 그러나 의무적으로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땐 바쁘지 않더라도 피곤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쁘지만 즐겁고 재미있고 흥분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사십시요. 
목사님의 마지막 트윗 

목사님의 추모 영상에서, 목사님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시더군요. 마치 천국에 계시는 듯한 평화로움, 기쁨... 그런 것들이 얼굴에서 절로 느껴졌습니다. 네, 그야말로 천사 같았어요. 동영상을 보며 나도 목사님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빠져 들었습니다. 

내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주님! 하용조 목사님께서 마지막 설교에서 말씀하셨듯이, 이 감동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저 혼자 간직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나누고 싶네요. 너무나 부족하고 부족한 저이지만, 하나님께서 빛을 주시어 하나님의 큰 쓰임이 되게 해 주세요.

이제, 하용조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 곁에서 활짝 웃으시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시겠지요. 그 분의 모습이 내 눈에 선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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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3.02.05 02:59


오사마 빈 라덴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Raden)이 미국 네이비 실(Navy SEAL)의 제로니모(Geronimo) 작전으로 지난 5월 1일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Abbottabad)에서 사살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백악관 앞에 수많은 미국인들이 모여 성조기를 흔들며 "USA"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원수가 죽었으니 오죽 기뻤겠는가.

그는 지난 수십년간 미국과 미국의 동맹세력을 적으로 삼아 여러 차례 테러를 저질러 수많은 인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웃을 폭력으로 위협하는 방식은 종교적 신념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반인륜적인 행위들은 지탄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죽음을 바라보며 조금도 기뻐할 수가 없다. 우선, 원수에 대한 폭력적인 복수는 결코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이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무원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43~48)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Al-Qaida) 대원들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와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Pentagon) 등을 공격하여 3000 여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미국인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다면, 분노와 적개심을 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어야 했다. 조지 부시(George Walker Bush) 전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을 선포하기 보다, 회개의 기도, 그들을 향한 용서를 선포하였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테러와의 전쟁은 많은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더구나 작전 당시 비무장 상태였던 빈 라덴을 재판 없이 바로 사살한 것도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유엔 전범재판소(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IWCT)의 전직 판사였던 다야 지카코(多谷千香子) 호세(法政)대학교수는 "만일 빈 라덴 사살이 합법이라면 미국에 위험한 인물은 누구든 죽여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라고 말했다. 또한 독일 베를린 내무장관인 에르하르트 쾨르팅(Ehrhart Koerting), 유럽연합(EU)의 내무담당 집행위원인 세실리아 말스트룀(Cecilia Malmström), 및 네덜란드의 국제법 전문가인 게르트 얀 크놉스(Gert-Jan Knoops) 등은 "빈 라덴을 법정에 세웠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참조) 그의 신병을 법적인 절차에 의해서 처리하였더라면 이슬람권의 반발이 덜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빈 라덴의 죽음이 도리어 더 많은 테러를 촉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알 카에다는 인터넷 성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피의 보복을 천명했다. 
"성스러운 전사 오사마 빈 라덴의 피는 우리와 모든 무슬림에게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어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행복은 슬픔으로 변할 것이며 그들의 피는 그들의 눈물과 섞이게 될 것이다." (연합뉴스 참조)



십자가 (출처: 우드사이드 한국 순교자 성당)



이러한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도 회개, 둘째도 회개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슬람인들을 두려움 혹은 타도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진정한 우정과 사랑으로 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통곡하고 회개해야만 하겠다. 이슬람권에 선교와 전도를 하자고 외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도 "믿음, 희망, 사랑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사랑"(고린도전서 13:13)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고 온갖 신비한 것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심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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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직전 "주여"라고 외쳤던 북한의 형제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2.07.11 23:07



북한지하교회의 실상을 담은 동영상입니다. 특히, 북한 기독교인의 총살장면이 잊혀지지 않네요.
총포가 뿜어지기 직전 "주여"라고 외치는 형제들의 목소리,

숨어서 조용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매의 목소리.
형언할 수 없는 어떠한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아! 바로 저기에 진짜 믿음이, 진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구나.'
작년까지 1만명이 넘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미 북한에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평양은 원래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곳, 예배가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평양이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독재자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재자들이 물러나고 평양이 다시 제2의 예루살렘이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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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커닝햄 목사,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2.06.23 22:33


로렌 커닝햄 목사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만약 오늘 통일이 되면 북한에 전달할 성경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적어도 600만 권의 성경이 필요할 것이다."

- 로렌 커닝햄 목사의 국내강연


국제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 목사(Rev. Loren Cunningham)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 당장 북한에 복음을 전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할 성경만큼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되자마자 제일 먼저 북한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통일이 될 지 모르겠지만,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든 헌신하고 싶은 것이 저의 작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목사님은 또 북한 동포들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정리해 주고 계십니다. 겸손과 사랑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겸손이 교만을 이기고 용서는 미움을 이긴다.
우리가 북한을 향해 가져야 할 마음은 겸손이고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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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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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1.10.15 11:04

푸르름 (출처: desktopwallpaper-s.com)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최근 불교계에서 존경받는 분인 법륜스님(法輪)이 희망세상만들기 100회 강연에서 기독교의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법륜스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복음 10:25~37)를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41~46). 

법륜스님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무리 목사나 신부라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가장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것이요,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면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중략)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어찌보면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부활은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했다.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 그것이 해탈과 열반이요, 부활이었다. 그는 예수를 부처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해탈과 열반에 이른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볼 뿐이다. 따라서, 법륜스님 자신도 수행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셈이다. 

불교에서 해탈(解脫, moksha)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해탈이란 탐욕으로부터 비롯되는 번뇌(煩惱)와 과거의 업(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곧 불교의 구원이다. 불교에서 인생이란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해탈이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 즉 '불어서 (모든 번뇌가)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 경지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무(無)의 상태에 가깝다.[각주:1] 

해탈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해탈을 통하여 열반(涅槃, nirvana)의 경지에 이르면 윤회(輪廻, reincarnation)를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는 고행을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누구나 자신처럼 스스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설법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란 해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독교에서 구원(救援, salvation)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해탈이 생명의 세계에서 떠나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세계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구보 아리마사는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는 무(無)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한다.
생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크신 생명의 약동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이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기독교의 영생은 “생명의 큰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이다.
(출처: 구보 아리마사의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중 - 나침반출판사)

불교적 관점에서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여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옳다. 미움과 탐욕, 그리고 병과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인간의 세상을 결코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이 처음부터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에서 보듯 아름답고 이상적인 낙원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매우 만족하시고 기뻐하셨다 (창세기 1:26~31).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에 타락한 이후, 그 후손들에게 죄가 되물림되어 결국 오늘날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죄악과 번뇌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 해탈을 통하여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열반에 이른 부처가 영원한 생명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는 생명으로부터 떠난 것이기에, 열반의 경지에는 '생명'이 없다. 열반에 이른 붓다가 영원히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스타니파타 (Suttanipata)"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출처: 서재성 목사의 논단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꺼져버린 불꽃'과 같은 열반과 달리,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어떻게 고통으로 가득한 생명의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 인간의 형체를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요한복음 1:14). 그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이심과 동시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또한, 만물이 주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8:5~6).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부활할 수도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고 또 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놀라운 의미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의 죄로 온 인류가 죄악에 휩싸이게 된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으나 그 때는 율법이 없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이 지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
또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많은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죽음이 사람을 지배하였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와서 범죄가 늘어나게 되었으나 죄가 늘어난 곳에는 은혜도 더욱 풍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법륜스님이 말한 것처럼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해탈과 동일한 개념도 아니다. 그런 부활은 예수님 없이도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십자가 앞에서 죄의 종이었던 나의 영혼이 죽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주로 믿음으로서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6:4~11). 부활은 내 힘으로 달성하는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로마서 8:31~39).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2:8~9). 

불교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자신이 짊어진 엄청난 죄의 무게를 벗겨낼 수가 없다. 설령 석가모니와 같은 고행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는 있을 지언정, 영원한 생명의 기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고는, 또한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수가 없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이유이다.

그때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게 하려고 선택하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명확하게 '없음'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목숨을 다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몸을 불살라서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죄의 종일 뿐이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방탕하고 죄에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의 종이라 부르실 것이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기독교인이라고 나를 욕할지라도, 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야 한다. 사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용기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블로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노력에 비한다면 혼자 떠들어대는 것에 불과하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참으로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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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조: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797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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