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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푸르름 (출처: desktopwallpaper-s.com)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최근 불교계에서 존경받는 분인 법륜스님(法輪)이 희망세상만들기 100회 강연에서 기독교의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법륜스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복음 10:25~37)를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41~46). 

법륜스님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무리 목사나 신부라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가장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것이요,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면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중략)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어찌보면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부활은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했다.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 그것이 해탈과 열반이요, 부활이었다. 그는 예수를 부처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해탈과 열반에 이른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볼 뿐이다. 따라서, 법륜스님 자신도 수행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셈이다. 

불교에서 해탈(解脫, moksha)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해탈이란 탐욕으로부터 비롯되는 번뇌(煩惱)와 과거의 업(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곧 불교의 구원이다. 불교에서 인생이란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해탈이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 즉 '불어서 (모든 번뇌가)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 경지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무(無)의 상태에 가깝다.[각주:1] 

해탈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해탈을 통하여 열반(涅槃, nirvana)의 경지에 이르면 윤회(輪廻, reincarnation)를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는 고행을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누구나 자신처럼 스스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설법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란 해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독교에서 구원(救援, salvation)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해탈이 생명의 세계에서 떠나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세계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구보 아리마사는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는 무(無)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한다.
생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크신 생명의 약동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이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기독교의 영생은 “생명의 큰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이다.
(출처: 구보 아리마사의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중 - 나침반출판사)

불교적 관점에서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여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옳다. 미움과 탐욕, 그리고 병과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인간의 세상을 결코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이 처음부터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에서 보듯 아름답고 이상적인 낙원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매우 만족하시고 기뻐하셨다 (창세기 1:26~31).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에 타락한 이후, 그 후손들에게 죄가 되물림되어 결국 오늘날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죄악과 번뇌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 해탈을 통하여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열반에 이른 부처가 영원한 생명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는 생명으로부터 떠난 것이기에, 열반의 경지에는 '생명'이 없다. 열반에 이른 붓다가 영원히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스타니파타 (Suttanipata)"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출처: 서재성 목사의 논단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꺼져버린 불꽃'과 같은 열반과 달리,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어떻게 고통으로 가득한 생명의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 인간의 형체를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요한복음 1:14). 그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이심과 동시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또한, 만물이 주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8:5~6).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부활할 수도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고 또 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놀라운 의미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의 죄로 온 인류가 죄악에 휩싸이게 된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으나 그 때는 율법이 없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이 지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
또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많은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죽음이 사람을 지배하였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와서 범죄가 늘어나게 되었으나 죄가 늘어난 곳에는 은혜도 더욱 풍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법륜스님이 말한 것처럼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해탈과 동일한 개념도 아니다. 그런 부활은 예수님 없이도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십자가 앞에서 죄의 종이었던 나의 영혼이 죽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주로 믿음으로서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6:4~11). 부활은 내 힘으로 달성하는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로마서 8:31~39).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2:8~9). 

불교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자신이 짊어진 엄청난 죄의 무게를 벗겨낼 수가 없다. 설령 석가모니와 같은 고행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는 있을 지언정, 영원한 생명의 기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고는, 또한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수가 없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이유이다.

그때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게 하려고 선택하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명확하게 '없음'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목숨을 다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몸을 불살라서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죄의 종일 뿐이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방탕하고 죄에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의 종이라 부르실 것이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기독교인이라고 나를 욕할지라도, 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야 한다. 사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용기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블로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노력에 비한다면 혼자 떠들어대는 것에 불과하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참으로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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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조: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797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