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1.04.19 내 곁에 계신 당신 by illbegoodtree
  2. 2011.03.26 지옥의 문 앞에 선 크리스찬 by illbegoodtree
  3. 2011.03.25 자끄 엘륄, 가난을 말하다 by illbegoodtree
  4. 2011.03.15 그리스도인의 향기 by illbegoodtree
  5. 2011.03.09 진정한 사랑 by illbegoodtree

내 곁에 계신 당신

시가 있는 마을 / illbegoodtree 2011.04.19 00:50


주님 사랑해요 (출처: 연세중앙교회)



내 곁에 계신 당신

유원상


네 알아요
지금 내 곁에 계신 것을

그런데도
왜 이리 당신이 보고 싶은 걸까요
당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아시죠?
한 모금의 물도 없는 사막 속에서
헤메이던 시간들
저 얼마나 외로웠다구요
텅빈 내 가슴이 얼마나
차가웠었는지
어둠 속에서
얼마나 떨고 울었는지

따스해요
이런 느낌 처음이에요
날 위해 죽으신 당신 생각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눈 고이 감으면
당신이 보이고
조용한 곳에 있으면
당신의 목소리 들려와요
당신의 발자국만 봐도
당신이 오는 소리 들려와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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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사랑, 예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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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 앞에 선 크리스찬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26 23:27



며칠 전 폴 워셔(Paul Washer) 목사에 관한 글(2011/03/24 - 폴 워셔, 영원을 위해 사십시오!)을 쓴 적이 있다. 애원하는 듯한 설교, 다소 과격한 말투와 몸짓... 처음에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그의 말투와 행동들이 이제는 내 가슴에 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갈까? 그래서,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같은 크리스찬이라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모두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천국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더 높은 등급의 천국에 갈 것이요, 악하게 살았던 크리스찬은 비록 낮은 등급이지만 그래도 천국에 갈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나도 믿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예수를 참되게 믿고 있다는 착각이다. "나는 세례도 받았고 주님을 오랫동안 믿었느니 천국에 가는 티켓을 확실히 갖고 있음을 굳게 믿어. 나는 천국에 반드시 갈 거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로마서 8장의 말씀을 굳게 믿는다. 그런데, 자세히 그 말씀을 뜯어 보자. '정죄함이 없는', 즉 심판을 받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여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례를 받으면, 혹은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 사역에 열심히 봉사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선교사나 목사로서 일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즉 크리스찬 모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얼마 동안 묵상한 후에 나는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해서, 집사나 권사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8~50)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세례는 천국에 가기 위한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지 않는다면, 온 몸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정성의 노력을 계속 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폴 워셔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다가가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았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죄 짓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열심히 교회 봉사도 하고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런데, 우리가 천국의 문을 두드릴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폴 워셔는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길 원했기 때문에 크리스찬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에 초대하기만 하면 확실히 거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책 어디를 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길 원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칼빈주의(Calvinism)의 대표적인 교리 중의 하나이다.[각주:1] 칼빈주의 전통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이며, '저항할 수 없는 은총' (Irresistable Grace)에 의해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원하셔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어떠한 죄를 지어도 나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폴 워셔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죄의 회개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만 사랑하십시오.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고,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며 무늬만 크리스찬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갈망하십시오.


내 곁에 오신 예수님 (출처: RPM Ministries)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우리가 진심을 다하여 나아가야 얻게 되는 자발적 선택(Voluntary election)이며, 구원은 믿음, 회개, 사랑, 거룩함 속의 성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전세계에는 예수를 믿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까지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은데 왜 세상은 아직도 천국과 같지 않은가? 전쟁과 증오와 죄악이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활개치고 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단 1%만 있다고 해도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욱 나아지지 않았을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이 기뻐하는 참된 사도는 아마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참된 제자일까? 결코 결코 아니다. 나는 죄악의 술에 취해 있으며, 교만과 정욕으로 날마나 씨름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 폴 워셔가 호소했던 것처럼 깨어나고 싶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기쁨이 되고 싶다.

  1.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으로 요약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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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 가난을 말하다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25 01:03

자크 엘륄 (출처: natureculture.org)


자끄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마르크스 주의와 신학의 조화를 시도한 프랑스의 신학자이다.[각주:1] 그르노블(Grenoble)의 성경 스터디 모임에서 그의 신학을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느냐, 즉 어떻게 현실적 문제들과 성경에서 언급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조화시키느냐를 다루는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듯 하다.

사실 이것은 내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현실과 이상은 기름과 물과 같은 관계와 같아서, 쉽게 조화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이상적 삶을 꿈꾸곤 했던 나로서는 현실에서의 패배 의식이 항상 나를 괴롭혔다. 청년 시절에는 거듭된 패배와 좌절에도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어짜피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가는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것은 일종의 아편과 같아서 죄의식이 주는 좌절감과 고통은 줄여주었지만, 내 마음 속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순수한 이상은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현실과의 타협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여겼다.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 역시 부(富, wealth)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는 선택이 아닌 '자율적 의무'이다. 그런데, 자끄 엘륄은 '돈은 축복이 아닌 악'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 당신은 어찌하여 돈이 축복이 아닌 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은 그저 쇳덩이일 뿐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쓰면 선하게 쓰임 받는 것이요, 악하게 쓰면 악하게 사용될 뿐입니다. 돈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자끄: 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상과 같은 객체입니다. 그것은 인격화되어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게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의 악한 마음이 돈을 인격화시킨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돈은 그릇된 우상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끄: 돈이 선한 도구가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돈의 질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과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돈은 근본적으로 모든 관계를 '매매'의 관계로 바꾸어 놓으니까요. 경제는 '교환'의 메커니즘에서 성립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질서 속에서는 '교환'이 아닌 '거저 주는 행위'만 존재할 뿐이지요.

: 돈은 결국 주고 받는 매매의 정신에 기초해서 성립된 객체이므로, 성경의 이상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우리는 돈 없이 당장 어떠한 일상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당장 돈을 내팽겨칠 수는 없잖습니까?

자끄: 네. 좋은 지적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삶만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돈'에 숨겨진 모든 거짓과 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돈'이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은혜의 질서를 매매의 질서 속에 통과시키는 것, 즉 거저 주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부'보다는 '가난'을 사모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가난을 사모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정신적인 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왔다.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이다. 가난한 자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겠는가? 재물이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하게 되기를 원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참다운 명제가 되려면 자끄 엘륄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즉, 돈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히려 가난을 사모하는 정신으로 나를 무장시켜야 한다. 가난한 자만이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둘테니. 더 나아가, 은혜에 따르는 삶, 거저 주는 삶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연후에야, 부가 참다운 하나님의 쓰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내게 주어진 모든 돈에 은혜와 사랑의 날개를 달아줄 수 있을테니.

마더 테레사 수녀 (출처: OurLIC)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녀가 결코 부자였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수녀복과 몇 가지 생활용품이 전부였다. 그녀를 이끈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겠다는 사명 뿐이었고, 그 사명의 빛은 그녀에게 모인 모든 돈의 권세를 은혜와 사랑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고 오직 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배했다. 또, 18세기 청교도들이 개척하여 세워진 미국이 부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검소한 생활이 원동력이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자끄 엘륄은 검소와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부'보다는 '가난'을, '매매'보다는 '은혜'를 추구하는 삶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욱 정신적으로 '부'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울려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0)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이란 경제적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거짓된 정욕과 이기심, 욕망을 포기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가난하면서도 마음 속에 온갖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자끄 엘륄이 말한 '은혜의 질서'는 돈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가령, 직장에서의 일이 지금껏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면, 나의 달란트가 그저 내 능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허상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새로운 빛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돈이 그러하듯, 직장의 일과 나의 달란트도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일, 이웃에게 헌신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할 것이다.

  1. 자끄 엘륄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세계 자끄엘륄협회(http://www.jacques-ellul.org)와 한국 자끄엘륄협회(http://www.jacques-ellul.com)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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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향기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15 07:39

꽃 (출처: marcspon & books)


꽃에 향기가 있고 꽃마다 제각기 다른 향기를 뿜어 내듯이, 사람에게도 각자 풍기는 고유의 향기가 있다. 싱그러운 향기를 지닌 사람, 매력적인 향기를 지닌 사람, 잊혀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겨운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향기는 사람을 밀고 당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란 무엇일까? 아프리카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나 이태석 신부와 같은 향기,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지니고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과 같은 향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믿음과 사랑은 역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믿음과 사랑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향기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향기다.

나를 대외적으로 높이지 않고, (스스로는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나를 낮추는 것, 아무리 배운 지식이 많더라도 끊임없이 남에게서 배우고 익히려는 자세 등등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겸손의 모습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의 의미와 겸손한 삶의 모습은 그러한 상식적인 정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겸손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실 때, 온갖 유혹을 받으셨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모두 물리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태복음 4:4,7,10)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기 전, 감람 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도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가기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던 주님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의 향기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교만해 보였겠는가? 그러므로, 겸손은 하나님께 순종하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거짓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라고 말씀하셨다. 종종, 나는 그다지 경건한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신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교만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달란트를 나를 높이는 일이 아닌 주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떡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라면 계속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회개와 용서 (출처: 천주교 안락성당)

겸손은 ‘회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장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적인 자만감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제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 영적인 레벨이 다르다고 여기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못한 존재들이고 훈계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구역질 나는 향기라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사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간다고 믿지 않는다.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직접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나 자신의 회개만이 있을 뿐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1~5)

남의 허물을 보아도 오히려 스스로 더욱 깊이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야말로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주는 향기가 아닐까 싶다. “너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런 식으로 방탕하게 사니까 맨날 그 모양이다”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제가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함께 나누지 못한 저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이웃과 더 많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겸손은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겸손이 나를 낮추는 것이라고 해서,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고기가 하나도 잡히지 않아 낙심하고 있는 한 어부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고기를 잡도록 해 주셨다. 그는 놀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습게 보았던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는 놀라고 만다. 훈계하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나를 더 크게 높여 주시다니! 주님께서 잡아주신 수많은 고기보다 더 중요했던 한마디는 바로 시몬으로 하여금 참다운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었다. 그는 훗날 예수님의 사도인 베드로이다. 겸손이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사랑과 가치를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와 이웃를 지극히 사랑하시듯 나와 이웃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장면을 연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극한 겸손으로 우리 각자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출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겸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안에 얼마나 많은 허영과 교만이 도사리고 있는지 보게 된다. 남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교회에서는 착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나의 모습도 본다. 반면,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고 우습게 보면,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곤 한다. 어릴 시절 나를 무시하고 헐뜯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매우 컸던 모양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허욕에 흔들리기 쉬운 존재인가. 복음을 묵상하는 경건한 나의 모습 뒷면에는 욕망에 뒤덮인 매우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 또한 숨겨져 있음을 본다. 아마도 그 추악한 뒷면을 먼저 본 사람이라면,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인지를 알고는 당장 침을 뱉고 돌을 던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던가!

그렇게 하나님을 속이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결국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너무나 큰 죄인이면서도 복음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것,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인가 보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 속에서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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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09 01:41

사랑의 싹 (출처: 호평교회)



고린도전서 13장은 아마도 성경의 모든 부분 중에서 내 가슴 속에 큰 감동을 주는 가장 극적인 말씀이 아닌가 싶다. 모든 사람이 그토록 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love)'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서부터 청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장 간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그토록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임에도 도대체 무엇인지 참으로 알기 어렵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게 알기 어려운 '사랑'이란 어떠한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언변으로 진리를 말할지라도, 아무리 큰 지혜와 남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내가 아무리 내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이웃에서 봉사하고 헌신할지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진정한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된다.

가령, 교리의 문제로 교파가 갈라지거나, 예수를 믿는 종파끼리 서로 다투는 일들은 거기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복지에 많은 기여를 하고,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가장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교만와 위선으로 가득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태석 신부가 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러 갔을 때, 처음에는 주민들의 병과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과 오래 지내면서 차츰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함께 있어주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을 더욱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후부터는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리 그럴 듯한 교리로 무장한 종교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가장 단순한 교리를 가진 종교일지라도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라면 세상의 빛이 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인내, 온유,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참음, 온전한 믿음과 소망 등이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참으로, 이와 같은 사랑을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저 입술로만 고백하면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가 '믿음'만 강조하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사랑'의 종교이다.[각주:1]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사랑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요, 믿음이 없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나날이 깨닫게 된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그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값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조차 기도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묵상해 본다. 주님의 말씀은 길을 잃고 헤매이던 우리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였고, 주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이웃과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아직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조금씩 그 길로 나아가고 싶다. 그 진정한 사랑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숨쉬어 사랑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본다.



  1. 혹자는 개신교는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가톨릭은 믿음 뿐만 아니라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본질적으로 믿음과 실천적 행위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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