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3.26 지옥의 문 앞에 선 크리스찬 by illbegoodtree
  2. 2011.03.20 재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by illbegoodtree
  3. 2010.01.11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 by illbegoodtree
  4. 2010.01.09 영혼을 훔치는 도둑 by illbegoodtree

지옥의 문 앞에 선 크리스찬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26 23:27



며칠 전 폴 워셔(Paul Washer) 목사에 관한 글(2011/03/24 - 폴 워셔, 영원을 위해 사십시오!)을 쓴 적이 있다. 애원하는 듯한 설교, 다소 과격한 말투와 몸짓... 처음에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그의 말투와 행동들이 이제는 내 가슴에 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갈까? 그래서,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같은 크리스찬이라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모두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천국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더 높은 등급의 천국에 갈 것이요, 악하게 살았던 크리스찬은 비록 낮은 등급이지만 그래도 천국에 갈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나도 믿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예수를 참되게 믿고 있다는 착각이다. "나는 세례도 받았고 주님을 오랫동안 믿었느니 천국에 가는 티켓을 확실히 갖고 있음을 굳게 믿어. 나는 천국에 반드시 갈 거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로마서 8장의 말씀을 굳게 믿는다. 그런데, 자세히 그 말씀을 뜯어 보자. '정죄함이 없는', 즉 심판을 받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여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례를 받으면, 혹은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 사역에 열심히 봉사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선교사나 목사로서 일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즉 크리스찬 모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얼마 동안 묵상한 후에 나는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해서, 집사나 권사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8~50)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세례는 천국에 가기 위한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지 않는다면, 온 몸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정성의 노력을 계속 하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폴 워셔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다가가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았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죄 짓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열심히 교회 봉사도 하고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런데, 우리가 천국의 문을 두드릴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폴 워셔는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길 원했기 때문에 크리스찬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에 초대하기만 하면 확실히 거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책 어디를 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길 원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칼빈주의(Calvinism)의 대표적인 교리 중의 하나이다.[각주:1] 칼빈주의 전통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이며, '저항할 수 없는 은총' (Irresistable Grace)에 의해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원하셔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어떠한 죄를 지어도 나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폴 워셔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죄의 회개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만 사랑하십시오.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고,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며 무늬만 크리스찬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갈망하십시오.


내 곁에 오신 예수님 (출처: RPM Ministries)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우리가 진심을 다하여 나아가야 얻게 되는 자발적 선택(Voluntary election)이며, 구원은 믿음, 회개, 사랑, 거룩함 속의 성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전세계에는 예수를 믿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까지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은데 왜 세상은 아직도 천국과 같지 않은가? 전쟁과 증오와 죄악이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활개치고 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단 1%만 있다고 해도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욱 나아지지 않았을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이 기뻐하는 참된 사도는 아마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참된 제자일까? 결코 결코 아니다. 나는 죄악의 술에 취해 있으며, 교만과 정욕으로 날마나 씨름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 폴 워셔가 호소했던 것처럼 깨어나고 싶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기쁨이 되고 싶다.

  1.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으로 요약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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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1.03.20 11:38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돌아본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찬란한 문명,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문명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상상조차하기 힘들었던 놀라운 과학기술 문명과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분명 우리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더 많은 기계과 장치를 갖고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더 많은 도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실로, 슈퍼마켓에 가면 먹고 싶은 종류의 음식은 대부분 계절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고,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하루 이틀이면 날아갈 수 있다. 집에 들어서서 스위치만 누르면 전등이 켜지고,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펑펑 나오며, 가스렌지를 돌리면 언제든지 요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해 보자. 만약 어느 순간 갑자기 전기를 공급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집에 와서, 스위치를 눌러도 전등이 켜지지 않아 당황한다. 어둠 속에서 허둥대다가 겨우 촛대를 찾아내어 불을 켠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 컴퓨터를 켜 보아도 켜지지 않고 인터넷도 쓸 수 없고 전화도 불통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도 이제 단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슈퍼마켓에 가니 두려움에 휩싸인 시민들이 잔뜩 사재기를 하여 선반은 텅텅 비어있다.

대재앙 (출처: 게렉터블로그)

이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 싶지만, 얼마 전 일본 센다이 인근에서 발생하였던 강도 9.0의 지진과 쓰나미가 어떻게 한 지역을 철저히 파멸시키는지를 우리는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쓰나미로 인해서 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건물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고, 도로는 종이짝처럼 구겨졌다. 순식간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암흑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지진의 여파로 인근의 원자력 발전소가 일부 붕괴되어 방사선이 심각하게 누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사선이 인체에 심각한 해를 입혀 암을 유발하고 기형아를 낳게 하는 등 부작용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어느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가 일본 전체를 떨게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는 수백년 동안 꺼지지 않는 연료봉을 갖고 있는 수천 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져 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전체 전력의 80% 정도를 원자력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다.) 만약 인류에 큰 전쟁이나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 세상의 원자력 발전소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방사선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인류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일본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엄청난 재앙은 화려한 과학기술 문명의 허상과 그늘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문명은 편리함을 주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 한번의 자연재해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가 그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함에 취해서, 욕망의 술에 취해서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도시와 문명에 지진과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것처럼, 한 개인에게도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고난이 갑작스럽게 밀어닥칠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 파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시한부 선고와 같은 병 등등. 이러한 쓰나미가 밀려올 때, "모든 것이 끝났어"라고 말하며 우리는 절망하고 하늘을 원망한다.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야말로 우리 삶의 실체를 바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달콤하고 욕망에 취한 삶을 영원히 계속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때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내게 닥쳐올 지 모르는 쓰나미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 쓰나미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아픔이 될 수도 있다. 내게 닥쳐올 쓰나미에 대비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에서도 크고 작은 쓰나미가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방탕하게 살던 젊은 시절의 중간중간에는 끊임없는 쓰나미가 있었다. 군대와 직장에서 구타와 모욕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직장을 잃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쓰라린 고통의 시간들은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살았던 내 삶의 응분의 결과였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채찍을 주시고, 그래도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큰 쓰나미와 같은 시련도 주시는 것 같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바울은 회개와 더불어 죄와 욕망으로 더럽혀진 영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순간에 욕망에 찌들려 살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그 영적 변화란 한 순간에 성인으로 바뀐다는 의미라기 보다 사람의 마음이 이제 더 이상 죄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된 후에도 계속 죄를 지을 수는 있다. 다만, 죄를 지을 때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출처: 자연사랑)

이렇게 '새 사람'이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무엇보다도 죽음과 고통을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과거의 나는 죽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내게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도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이니 오직 감사할 뿐이다. 절망도 감사, 슬픔도 감사, 배고픔도 감사, 모든 것이 감사할 일 뿐이니, '새 사람'이 되면 오직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새 사람'이 된 자에게 '쓰나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영적으로 강건하고 항상 비어 있고 심판에 준비되어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왜 '쓰나미'를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 온갖 걱정과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난 일본 지진 당시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알고 어떤 할아버지가 미리 높은 곳으로 피신을 했는데, 두고온 물건을 찾으러 잠깐 마을로 내려갔다가 결국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구사일생 끝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참으로 생사를 가르는 위험한 도박을 한 셈이다. '내 것', '내 물건'에 대한 집착은 큰 환난을 분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닮아 영적으로 강건하고 마음이 비어 있으며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협의적인 의미에서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즉, 이제 더 이상 죄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나는 아직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즉, 진정으로 내 마음은 비어있지 못하고 아직도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고 죄에 허덕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나의 실족은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지탄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7~19)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 죄 안에서 고생하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도 신실한 믿음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여종과 관계를 맺고 떠나 보내는 죄를 저질러 오늘날 아랍인과 유대인과의 뿌리깊은 원한과 갈등의 씨앗을 뿌리게 된 것이었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자녀의 심리적인 장애나 문제들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함을 볼 때, 나 한 사람의 죄악이 후손과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출처: 타베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죄의 고리를 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것이었다. 이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온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모든 형제와 자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태복음 12:50)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나를 정욕으로 흔들고, 교만하게 하며, 나태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쉬지 않고 내 믿음을 약하게 하고, '생명'보다는 현재의 '쾌락'적인 삶에 안주하도록 부추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중독되게 만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 이제 짊어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죄의 무게를 예수님 앞에 진정으로 내려놓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그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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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0.01.11 22:1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33)

하나님이 삶과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삶은 몸은 살아 있으나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시체나 다름없다. 나의 일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고, 가정이 있기 전에 세상이 있으며, 세상이 있기 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계신 까닭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함으로써, 내가 하는 모든 일과 가정이 참되고 올바르게 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먼저 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될 것이다.

오늘도 놀라운 경험을 했다. 창고문을 튼튼한 열쇠로 잠그려고 일단 임시로 자전거 열쇠를 문고리에 끼워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키를 돌려도 열쇠가 풀리지 않았다. 5분동안 씨름을 한 끝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열쇠가 열리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한마디 기도를 한 즉시 열쇠가 바로 스스르 풀렸다. 이럴수가!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 해 주셨음을 믿는다.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시고 나의 작은 일까지 간섭하시며 내 삶을 인도하여 주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은 삶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이기도록 하는 큰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 막데부르그로 인도하셨듯이, 이 곳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도록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

내 온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복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하자.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주는 훌륭한 통로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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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치는 도둑

일상 속에서 / illbegoodtree 2010.01.09 00:25

하나님께서 때로 시련이나 어려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심을 종종 느낄 때가 있다. 최근 수차례 물건을 도둑맞으면서 계속 원망만 쌓아왔지만, 이러한 일들 속에서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과 죄악을 깨닫게 하시고, 썩어가는 육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불과 며칠 전에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기"라는 글을 통하여,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로부터 물건을 다시 도둑맞게 되었다. 지하실에 두었던 아내의 여행용 가방이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한 달 전에도 내 여행용 가방이 없어진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창고에 정기적으로 들락거리는 도둑이 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자전거 부품을 훔쳐간 도둑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창고라니! 더구나 아욱스부르크(Augsburg)에서도 상당히 많은 물건들을 도둑맞았던 터였다. 

아무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지만 왜 이런 일이 계속 나에게 생기는 것일까? 나는 화가 났지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마태복음 5:38~44)을 상기시키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두려움은 더해만 갔다.
"지금은 그저 작은 물건을 훔쳐가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고 해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두려움은 바로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누군가가 나의 물건을 빼앗아가고 나를 해하려 드는 것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바로 육체에 대한 집착과 욕심 때문이 아닐까? 가령, 누군가가 내 물건을 빼앗가가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면, 그 물건이 내 소유라는 집착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어느 물건도 내 고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또, 누군가의 모욕과 조롱으로 인해서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내 안에 그릇된 자만감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육체를 해하려 하는 것을 두려워 함은 내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렇듯 타인이 내 육체에 주는 피해는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면서, 정작 온갖 사악하고 더러운 생각과 행동으로 나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일에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쳐가거나 나를 모욕할 때는 그에게 큰 분노를 느끼면서, 돌아서서는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누군가를 깔보고 무시하며 양심을 속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곤 한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인가! 

타인이 아무리 내 육체를 해하더라도 그들은 내 영혼에 털끝만큼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 내 영혼을 더럽히고 망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바로 나 자신이 내 영혼에 저지르는 폭력이 아닐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나를 모욕하고 조롱했던 사람,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 내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대단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의 영혼에 가하였던 지난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풍성한 복과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내 재산이라고 여기고 물질적인 욕심에 사로잡혔던 지난 날, 여인을 그저 내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지난 날, 선한 척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거짓말과 사악한 행동을 하는데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던 시간들...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입혔으며 내 영혼을 수도 없이 때리고 상처를 입혔는지 모른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그가 없었다면 평생 내 죄를 참으로 회개하지 못하였을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원수야말로 나의 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진정 나의 교만과 정욕, 그릇된 자만심,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던 지난 날들을 진정 회개하자. 뜨거운 회개의 눈물로부터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샘솟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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