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10.15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by illbegoodtree
  2. 2010.08.21 인격주의적 종교이해 by illbegoodtree
  3. 2010.08.21 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그리고 순례자의 길 by illbegoodtree
  4. 2009.12.25 행복한 크리스마스 by illbegoodtree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세상 이야기 / illbegoodtree 2011.10.15 11:04

푸르름 (출처: desktopwallpaper-s.com)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최근 불교계에서 존경받는 분인 법륜스님(法輪)이 희망세상만들기 100회 강연에서 기독교의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법륜스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누가복음 10:25~37)를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41~46). 

법륜스님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무리 목사나 신부라 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가장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것이요,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면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중략)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어찌보면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부활은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했다.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 그것이 해탈과 열반이요, 부활이었다. 그는 예수를 부처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해탈과 열반에 이른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볼 뿐이다. 따라서, 법륜스님 자신도 수행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셈이다. 

불교에서 해탈(解脫, moksha)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해탈이란 탐욕으로부터 비롯되는 번뇌(煩惱)와 과거의 업(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곧 불교의 구원이다. 불교에서 인생이란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해탈이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 즉 '불어서 (모든 번뇌가)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 경지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무(無)의 상태에 가깝다.[각주:1] 

해탈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해탈을 통하여 열반(涅槃, nirvana)의 경지에 이르면 윤회(輪廻, reincarnation)를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는 고행을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누구나 자신처럼 스스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설법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란 해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독교에서 구원(救援, salvation)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해탈이 생명의 세계에서 떠나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세계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구보 아리마사는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는 무(無)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향한다.
생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크신 생명의 약동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이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비유된다면, 기독교의 영생은 “생명의 큰 바다에 들어가 헤엄치는 것”이다.
(출처: 구보 아리마사의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중 - 나침반출판사)

불교적 관점에서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여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옳다. 미움과 탐욕, 그리고 병과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인간의 세상을 결코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이 처음부터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에서 보듯 아름답고 이상적인 낙원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매우 만족하시고 기뻐하셨다 (창세기 1:26~31).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에 타락한 이후, 그 후손들에게 죄가 되물림되어 결국 오늘날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죄악과 번뇌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 해탈을 통하여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열반에 이른 부처가 영원한 생명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는 생명으로부터 떠난 것이기에, 열반의 경지에는 '생명'이 없다. 열반에 이른 붓다가 영원히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스타니파타 (Suttanipata)"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출처: 서재성 목사의 논단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꺼져버린 불꽃'과 같은 열반과 달리,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어떻게 고통으로 가득한 생명의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 인간의 형체를 가지셨으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요한복음 1:14). 그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이심과 동시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또한, 만물이 주님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8:5~6).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부활할 수도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고 또 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놀라운 의미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의 죄로 온 인류가 죄악에 휩싸이게 된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으나 그 때는 율법이 없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이 지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
또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많은 죄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로 죽음이 사람을 지배하였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와서 범죄가 늘어나게 되었으나 죄가 늘어난 곳에는 은혜도 더욱 풍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법륜스님이 말한 것처럼 그저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해탈과 동일한 개념도 아니다. 그런 부활은 예수님 없이도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십자가 앞에서 죄의 종이었던 나의 영혼이 죽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주로 믿음으로서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6:4~11). 부활은 내 힘으로 달성하는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로마서 8:31~39).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2:8~9). 

불교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자신이 짊어진 엄청난 죄의 무게를 벗겨낼 수가 없다. 설령 석가모니와 같은 고행을 통하여 해탈에 이를 수는 있을 지언정, 영원한 생명의 기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고는, 또한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수가 없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이유이다.

그때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게 하려고 선택하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명확하게 '없음'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목숨을 다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몸을 불살라서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죄의 종일 뿐이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방탕하고 죄에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의 종이라 부르실 것이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기독교인이라고 나를 욕할지라도, 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야 한다. 사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용기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블로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노력에 비한다면 혼자 떠들어대는 것에 불과하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참으로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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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조: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영생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797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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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주의적 종교이해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0.08.21 22:48


내가 처음 종교를 접했던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어머님을 따라 성당을 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떠오르는 것은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보던 일, 성당 벽에 장식되어 있던 모자이크 그림들,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조각들, 성모 마리아 상...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는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가곤 했던 것 뿐이었다.
 
그 후 이사를 하게 되면서, 성당을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주관하고 이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곧잘 명상에 빠지곤 하였는데, 우주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카톨릭이라는 범주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어떠한 종교적 신앙도 갖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명상하고 기도하곤 했다. 나의 하느님 신앙은 자연과학에 대한 순수한 감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동양사상, 불교 사상 등에도 관심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하느님 신앙은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관심을 포기하여야만 한다는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겐 이 모든 사상들이 나름대로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신앙적 전통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종교전통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의문을 가지곤 했다.
 
그러던 중, 대학에 진학하면서 당시 서강대학교에 개설되어 있던 종교학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종교학과가 서울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만 개설되어 있고, 다행히 나는 훌륭한 교수님의 강의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학 수업을 처음 듣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기존에 알고 있던 자연과학의 이해범주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여 주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이 기독교적 입장에서 진리를 밝히는 학문이라면, 종교학은 사회과학적, 심리학적, 역사적 관점 등의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교현상의 진리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서강대학교 길희성 교수(Harvard University, Ph.D.)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 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학적 지성은 개방적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하며, 신학과 세속적 지성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서 연구하는 것이며, 접근방식은 대화적 접근방식과 인간주의적 접근방식이어야 한다."
길희성 교수의 강의는 내게 종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침을 제시하여 주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은 문화의 기반이 종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이 자신의 독자적 기준에 따라 운동하게 되는 세속화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문제가 국제적인 분쟁이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되는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직도 여전히 종교적인 문제는 인류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궁극적 기반(ultimate foundation)을 찾는 종교적 존재(homo-religious)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문제를 접하는 데 있어서, 그는 W. C. Smith의 인격주의적 종교 연구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종교현상에는 신자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있는 고정된 객관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현상의 의미를 위해서는 대화가 중요하다. ...... 이 종교현상이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결코 외부인이 신자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사에 있어서 유일한 옳은 지식은 '당사자의 의식 속에 참여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주객 대립의 인식이론은 지양되어야 하며 오히려 상호 신뢰와 존중 속에서 대화하는 길만이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합리적 인격주의라고 한다. 합리적 인격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는 공동체적인 비판적 자기의식을 의미한다."
일반적 진리관은 비인격적 객관성을 의미하지만, 스미스의 종교관은 인격적 진리관이다. 즉 종교에 있어 진리는 특정한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격주의적 종교연구는 다양한 종교를 접하는 대화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적 시대에 종교를 이해하는 방법론으로서 매우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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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그리고 순례자의 길

묵상 에세이 / illbegoodtree 2010.08.21 22:23




2007년 7월 2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한국인 23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탈레반 무장세력들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 죄수 23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한국인 인질 중 2명을 살해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봉사활동을 자원한 기독교인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이 내전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봉사활동을 했던 이유에 대하여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형제들을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들의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19세기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했던가. 그러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아프가니스탄 형제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한국의 젊은 청년들은 참으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순교하셨던 고 배형규 목사의 장례예배 당시 배 목사와 함께 신학을 공부한 동기 목회자들이 부르던 찬송가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이 지금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울려온다. 이 곡은 작사자와 작곡자를 알 수 없는「순례자의 노래」(Pilgrim's Song) 라는 외국 복음성가를 번역한 노래이다.[각주:1]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 지라도
오 내주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 찬양곡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가사

바울, 요한, 베드로와 같은 예수님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 성가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강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들은 도리어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그 누구보다도 더욱 큰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도들 그리고 고 배형규 목사님과 같이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이 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향해,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정한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악과 욕망과 거짓에 젖어들어 사는 삶은 아무리 편안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죽어 있는 삶이지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참다운 순례자의 삶, 사랑이 있는 삶이라면 비록 가난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깨어 있는 참된 생명이 있는 삶일 것이다.

참된 순례자의 길. 그 길을 걸어가고 싶다. 오직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을 향해 나아가는, 가진 것은 없지만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 가고 저 동산에 가게 될 때" 후회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고단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1. "순례자의 노래"에 대한 자세한 정보. http://blog.daum.net/osowny/138851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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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크리스마스

일상 속에서 / illbegoodtree 2009.12.25 22:13

우울했던 작년 크리스마스. 변변찮은 수입이 없던 당시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가족과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질 않았었다. 작년 여름 큰 희망으로 첫 발을 내디딘 독일 박사과정 유학이었지만, 시작부터 우리에겐 가시밭길이었다. 인터뷰까지 통과되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독일정부 장학금을 마지막 심사에서 탈락하여 끝내 받지 못하게 되었고, 당장 먹고 살 미래를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렸던 까닭이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보냈던 시간들, 답답하기만 한 처지, 가족과의 불화 등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한동안 공부와 연구에서 손을 놓기도 했다. 매섭도록 추웠던 작년 겨울은 내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가족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주님까지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하나님! 실컷 기도해 보았자 제 소원은 들어주시지 않는군요. 오히려 너무나 뼈아프고 괴로운 시간들만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이젠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단 그냥 닥치는대로 살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했는데도,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던 내게 다가온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몇몇 교우들이 종종 찾아와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특히, 아욱스부르그 한인교회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따스한 조언과 사랑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내는 "우리의 꿈과 소망을 하나님께서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거예요. 할 수 있는데까지 새로운 자리를 잡아봐요"라고 말하며 나를 강하게 독려해 주었다. 유럽에서 자리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아내의 신념에 찬 격려에 내 마음 속에서도 "그래, 이제 밑져야 본전이다.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몇달동안 이를 악물고 닥치는대로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연구직을 알아보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연구소 및 대학원으로부터 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7월말까지도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더 좋은 연구소의 고용 제의를 기다리기 위해 다른 곳의 제의를 거절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연구소에는 결국 합격하지 못하여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받았던 모든 소중한 기회를 아쉽게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역전이 일어났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기회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할렐루야! 밑져야 본전이니 처음 제의를 받았던 연구소에 다시 한번 연락해 보자는 아내의 제안이 성큼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연락해 보았다. 놀랍게도 연구소 측에서는 언제든지 나를 대환영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나는 이제 독일에서 정식 연구원으로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연구주제조차 생소하여 마음에 썩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의 연구과제가 향후 미래 과학을 이끌어 갈 전망있는 분야라는 확신이 들고 있다. 또한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족하지 않게끔 우리를 채워주시고 우리 가족을 더욱 더 넘치는 사랑과 화목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야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나의 부족함을 고치고 나의 달란트에 적합한 더 나은 내일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랍고 빈틈없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받은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하다. 지금 나는 연구원으로서 사랑스러운 가족과 평안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지난 역경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아직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영성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33)
지난 8월 막데부르그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내 마음에 일어난 큰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은지는 3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지는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러한 느슨한 신앙의 문제점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신 분은 할레 한인교회의 목사님이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6-7,12-13)
하나님의 종이 되라! 그렇다.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무엇을 하든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죽어가고 썩어가는 내 영혼을 구원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었던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절규했던 나를 이렇게 살려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신 분, 어찌 그 분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곧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새해 2010년에는 주님이 내 영혼의 중심에 계시는 "성령 충만의 해"가 되도록 하고 싶다. 성령이 내 마음에 충만하고 내 삶을 지배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드리며 이웃들과 진정한 사랑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싶다. 나의 직업과 다른 일들은 그 다음 순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는 연구도, 가정에서의 일도, 다른 봉사도 모두 하나님과 주님께 드리는 성스럽고 거룩한 것이 되도록 하고 싶다. 그리하여 내 삶을 통하여 이웃과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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