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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자끄 엘륄, 가난을 말하다

자크 엘륄 (출처: natureculture.org)


자끄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마르크스 주의와 신학의 조화를 시도한 프랑스의 신학자이다.[각주:1] 그르노블(Grenoble)의 성경 스터디 모임에서 그의 신학을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느냐, 즉 어떻게 현실적 문제들과 성경에서 언급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조화시키느냐를 다루는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듯 하다.

사실 이것은 내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현실과 이상은 기름과 물과 같은 관계와 같아서, 쉽게 조화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이상적 삶을 꿈꾸곤 했던 나로서는 현실에서의 패배 의식이 항상 나를 괴롭혔다. 청년 시절에는 거듭된 패배와 좌절에도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어짜피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가는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것은 일종의 아편과 같아서 죄의식이 주는 좌절감과 고통은 줄여주었지만, 내 마음 속에 결코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순수한 이상은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현실과의 타협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여겼다.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 역시 부(富, wealth)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는 선택이 아닌 '자율적 의무'이다. 그런데, 자끄 엘륄은 '돈은 축복이 아닌 악'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 당신은 어찌하여 돈이 축복이 아닌 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은 그저 쇳덩이일 뿐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쓰면 선하게 쓰임 받는 것이요, 악하게 쓰면 악하게 사용될 뿐입니다. 돈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자끄: 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상과 같은 객체입니다. 그것은 인격화되어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게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의 악한 마음이 돈을 인격화시킨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돈은 그릇된 우상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끄: 돈이 선한 도구가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돈의 질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과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돈은 근본적으로 모든 관계를 '매매'의 관계로 바꾸어 놓으니까요. 경제는 '교환'의 메커니즘에서 성립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질서 속에서는 '교환'이 아닌 '거저 주는 행위'만 존재할 뿐이지요.

: 돈은 결국 주고 받는 매매의 정신에 기초해서 성립된 객체이므로, 성경의 이상과 결코 조화될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우리는 돈 없이 당장 어떠한 일상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당장 돈을 내팽겨칠 수는 없잖습니까?

자끄: 네. 좋은 지적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삶만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돈'에 숨겨진 모든 거짓과 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돈'이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은혜의 질서를 매매의 질서 속에 통과시키는 것, 즉 거저 주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부'보다는 '가난'을 사모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가난을 사모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정신적인 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왔다.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이다. 가난한 자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겠는가? 재물이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하게 되기를 원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참다운 명제가 되려면 자끄 엘륄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즉, 돈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히려 가난을 사모하는 정신으로 나를 무장시켜야 한다. 가난한 자만이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둘테니. 더 나아가, 은혜에 따르는 삶, 거저 주는 삶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연후에야, 부가 참다운 하나님의 쓰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내게 주어진 모든 돈에 은혜와 사랑의 날개를 달아줄 수 있을테니.

마더 테레사 수녀 (출처: OurLIC)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녀가 결코 부자였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수녀복과 몇 가지 생활용품이 전부였다. 그녀를 이끈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겠다는 사명 뿐이었고, 그 사명의 빛은 그녀에게 모인 모든 돈의 권세를 은혜와 사랑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고 오직 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배했다. 또, 18세기 청교도들이 개척하여 세워진 미국이 부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검소한 생활이 원동력이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자끄 엘륄은 검소와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부'보다는 '가난'을, '매매'보다는 '은혜'를 추구하는 삶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욱 정신적으로 '부'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울려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0)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이란 경제적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거짓된 정욕과 이기심, 욕망을 포기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가난하면서도 마음 속에 온갖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자끄 엘륄이 말한 '은혜의 질서'는 돈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가령, 직장에서의 일이 지금껏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면, 나의 달란트가 그저 내 능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허상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새로운 빛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돈이 그러하듯, 직장의 일과 나의 달란트도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일, 이웃에게 헌신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할 것이다.

  1. 자끄 엘륄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세계 자끄엘륄협회(http://www.jacques-ellul.org)와 한국 자끄엘륄협회(http://www.jacques-ellul.com)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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