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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재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돌아본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찬란한 문명,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문명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상상조차하기 힘들었던 놀라운 과학기술 문명과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분명 우리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더 많은 기계과 장치를 갖고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더 많은 도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실로, 슈퍼마켓에 가면 먹고 싶은 종류의 음식은 대부분 계절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고,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하루 이틀이면 날아갈 수 있다. 집에 들어서서 스위치만 누르면 전등이 켜지고,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펑펑 나오며, 가스렌지를 돌리면 언제든지 요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해 보자. 만약 어느 순간 갑자기 전기를 공급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집에 와서, 스위치를 눌러도 전등이 켜지지 않아 당황한다. 어둠 속에서 허둥대다가 겨우 촛대를 찾아내어 불을 켠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 컴퓨터를 켜 보아도 켜지지 않고 인터넷도 쓸 수 없고 전화도 불통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도 이제 단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슈퍼마켓에 가니 두려움에 휩싸인 시민들이 잔뜩 사재기를 하여 선반은 텅텅 비어있다.

대재앙 (출처: 게렉터블로그)

이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 싶지만, 얼마 전 일본 센다이 인근에서 발생하였던 강도 9.0의 지진과 쓰나미가 어떻게 한 지역을 철저히 파멸시키는지를 우리는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쓰나미로 인해서 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건물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고, 도로는 종이짝처럼 구겨졌다. 순식간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암흑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지진의 여파로 인근의 원자력 발전소가 일부 붕괴되어 방사선이 심각하게 누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사선이 인체에 심각한 해를 입혀 암을 유발하고 기형아를 낳게 하는 등 부작용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어느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가 일본 전체를 떨게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는 수백년 동안 꺼지지 않는 연료봉을 갖고 있는 수천 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져 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전체 전력의 80% 정도를 원자력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다.) 만약 인류에 큰 전쟁이나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 세상의 원자력 발전소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방사선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인류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일본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엄청난 재앙은 화려한 과학기술 문명의 허상과 그늘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문명은 편리함을 주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 한번의 자연재해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가 그 문명의 화려함과 편리함에 취해서, 욕망의 술에 취해서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도시와 문명에 지진과 쓰나미가 밀어닥치는 것처럼, 한 개인에게도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고난이 갑작스럽게 밀어닥칠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 파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시한부 선고와 같은 병 등등. 이러한 쓰나미가 밀려올 때, "모든 것이 끝났어"라고 말하며 우리는 절망하고 하늘을 원망한다.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야말로 우리 삶의 실체를 바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달콤하고 욕망에 취한 삶을 영원히 계속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때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내게 닥쳐올 지 모르는 쓰나미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 쓰나미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될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아픔이 될 수도 있다. 내게 닥쳐올 쓰나미에 대비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에서도 크고 작은 쓰나미가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방탕하게 살던 젊은 시절의 중간중간에는 끊임없는 쓰나미가 있었다. 군대와 직장에서 구타와 모욕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직장을 잃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쓰라린 고통의 시간들은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살았던 내 삶의 응분의 결과였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채찍을 주시고, 그래도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큰 쓰나미와 같은 시련도 주시는 것 같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바울은 회개와 더불어 죄와 욕망으로 더럽혀진 영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순간에 욕망에 찌들려 살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그 영적 변화란 한 순간에 성인으로 바뀐다는 의미라기 보다 사람의 마음이 이제 더 이상 죄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된 후에도 계속 죄를 지을 수는 있다. 다만, 죄를 지을 때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출처: 자연사랑)

이렇게 '새 사람'이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무엇보다도 죽음과 고통을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과거의 나는 죽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내게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도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이니 오직 감사할 뿐이다. 절망도 감사, 슬픔도 감사, 배고픔도 감사, 모든 것이 감사할 일 뿐이니, '새 사람'이 되면 오직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새 사람'이 된 자에게 '쓰나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영적으로 강건하고 항상 비어 있고 심판에 준비되어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왜 '쓰나미'를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 온갖 걱정과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난 일본 지진 당시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알고 어떤 할아버지가 미리 높은 곳으로 피신을 했는데, 두고온 물건을 찾으러 잠깐 마을로 내려갔다가 결국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구사일생 끝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참으로 생사를 가르는 위험한 도박을 한 셈이다. '내 것', '내 물건'에 대한 집착은 큰 환난을 분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닮아 영적으로 강건하고 마음이 비어 있으며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협의적인 의미에서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즉, 이제 더 이상 죄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나는 아직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즉, 진정으로 내 마음은 비어있지 못하고 아직도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고 죄에 허덕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협의적인 의미에서의 '새 사람'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나의 실족은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지탄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7~19)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 죄 안에서 고생하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도 신실한 믿음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여종과 관계를 맺고 떠나 보내는 죄를 저질러 오늘날 아랍인과 유대인과의 뿌리깊은 원한과 갈등의 씨앗을 뿌리게 된 것이었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자녀의 심리적인 장애나 문제들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함을 볼 때, 나 한 사람의 죄악이 후손과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출처: 타베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죄의 고리를 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것이었다. 이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온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모든 형제와 자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태복음 12:50)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나를 정욕으로 흔들고, 교만하게 하며, 나태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쉬지 않고 내 믿음을 약하게 하고, '생명'보다는 현재의 '쾌락'적인 삶에 안주하도록 부추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중독되게 만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 이제 짊어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죄의 무게를 예수님 앞에 진정으로 내려놓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그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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