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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내 마음을 두드린 신비로운 음성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출처: 타베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쓰여진 텍스트로서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 살아 숨쉬듯이, 그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지며,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 나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주님에 대해서 더 많이 묵상하려 했지만, 도리어 마음은 더욱 게을러지기만 했다. 일에도 잘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저 컴퓨터 앞에서 멍하게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페이스북에 신앙과 관련된 글을 많이 올리곤 해서 주위 사람들이 볼 때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생활을 하겠구나’ 하고 추측할지도 모르지만, 실제 나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띠려는 노력은 했지만, 그저 미소에만 그칠 뿐 진정한 사랑과 이해는 없었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실종되었지만, 그들을 위한 기도는커녕 가족을 위한 기도조차 시간을 내어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휩싸인 채로 며칠을 지내다 교회 예배마저 가기 싫어졌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인데 무엇 하러 교회까지 가니? 그냥 집에서 조용히 혼자 예배를 드려라.’
이렇게 내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교회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는 곳이야’라고 대답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그르노블(Grenoble)의 한인교회에 갔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두셨던 것일까? 이성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나를 위한 설교처럼 나의 고민과 문제를 아주 자세히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가복음 2:18) 라고 물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보이는 경건한 모습과 평소의 여러분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경건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는 생활이 매우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지 않습니까? 야한 동영상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 유혹이 다가올 때, 자신을 절제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순절 기간은 절제를 통하여 주님이 당하신 고통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왜 게을러지고 무절제한 생활 속에서 공허감에 휩싸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주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진정한 노력이 없이 외양으로만 경건하고 남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설교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절제된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주위 친구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 역시 결국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임을 알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떠한 경건한 행동과 사랑의 노력도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쇼에 불과할 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1~8)

기도하는 여인 (출처: 타베크)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신앙에 관한 블로그 글을 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만약, ‘내 신앙의 체험들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일 뿐 누군가와 나눌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러한 행동 역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복음은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나눔’을 통해 전파된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그렇다. 우리는 나누어야 한다. 나의 신앙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나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위선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이기적이어서, 조금만 자신이 남으로부터 추앙 받으면 교만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바로 이럴 때,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과감히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 아는 용기, 절제할 줄 아는 용기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주님께서 목사님의 입술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고 계심을 똑똑히 체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계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시면서도 가장 자애로운 음성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