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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창세기 16장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오늘 설교말씀은 창세기 16장에 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큰 조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 창세기 16장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내가 출산을 하지 못하여 자신의 여종으로 하여금 임신을 하게 해 달라고 아브람에게 청한다. 결국 아브람과 여종이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종이 아브람의 아내를 멸시하였다. 아내는 그 여종을 학대하였고, 여종은 도망간다. 하나님께서 그 여종의 고통을 듣고 그녀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리니 다시 아브람에게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이 여종의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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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아브라함의 여종과 아들을 집안에서 내보내는 아브라함. (출처: 네이버)

 

이렇게 아브람의 실수는 봉합되는 듯 보였다. 아브람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신실한 믿음을 가졌고, 이것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는 문제였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실수는 아브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의 큰 비극을 낳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선조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반목의 뿌리는 이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아브람의 여종이 품었던 엄청난 원한이 이스마엘에게 전달되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스마엘이 아브람의 아내의 후손인 이삭에게 반감과 적대감을 품었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갈등, 더 나아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성스러운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서이기도 한 구약성서는 오늘날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갈등이 매우 뿌리깊은 것이며, 쉽게 풀리기 힘든 원한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브람의 여종이 가졌던 원한은 세대에서 세대로 넘어가면서 아랍인 사이에 더욱 커지고 증폭되었을 것이다. 아랍인들이 유대인이었던 예수에 대해 신앙을 갖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 하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원수처럼 싸우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사실은 한 형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다른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은 굉장히 놀랍다. 흔히,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이슬람이 믿는 알라가 전혀 다른 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알라는 결국 여호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들이 사실상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서로의 종교를 비방하고 놀라운 증오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극도의 감격에 휩싸여 있어 이 글을 어떻게 더 진행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독자께서는 비극을 논하고 있는데 무슨 감격이냐고 반문 하실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비극을 풀 수 있는 놀라운 열쇠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예수님, 그분께서 이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눈물과 원한을 녹여주시고 해방시켜 주실 그 분의 복음, 사실 그 분을 믿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나의 감격을 표현하기를 잠깐 절제하고 다시 펜을 들어보자. (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이미 내 눈에 감격의 눈물이 고여 있음을 고백해야만 하겠다.)

그 복음은 우리를 창조한 아버지 하나님을 열심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열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너를 죽이고 찌르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보라! 바로 그를 찌르는 원수에 의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해방시키셨다! 그는 그 복음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보이셨고 부활을 통해서 해방됨을 보이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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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예수와 십자가. (출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단번에 허무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민족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라고 선포하셨다. 자,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과 첩의 자손 이스마엘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들은 똑같이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그들은 사실 한 형제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엄청난 원한과 분노를 갖고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 바로 이삭이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랍인 대신 유대인에게서 나셨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오직 내 개인적인 상상일 뿐이다.) 용서와 사랑만이 이스마엘과 그들의 자손인 아랍인들이 갖고 있는 분노와 원한을 풀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들을 자신의 영토에서 몰아내고 끊임없이 반목하고 있다. 아랍인들의 증오는 이스라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의 역사와 맞물려 예수를 믿는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로 확대된다. 기독교는 이슬람의 적이 되고, 이슬람은 기독교의 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기독교의 책임이다. 서양 국가들이 18-19세기 동안 선교를 내세우며 제국주의적으로 아랍인들을 괴롭혔고,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인 용서와 사랑을 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증오와 멸시를 통해 이스마엘이 가졌던 것과 같은 원한을 더욱 증폭시켰을 뿐이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슬람과 아랍인을 증오하는 기독교라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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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아랍인의 얼굴. (출처: KCM)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종교가 아니기에 이슬람과 불교와 다른 종교조차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대적해서는 안 된다. 대적하는 순간부터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떠난 것이며 예수님을 떠난 것이다. 다른 종교인들이 쏘는 화살도 기꺼이 맞고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회개하고 그들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16장은 이렇게 내 마음에 깊은 자각을 주었고,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