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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마을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 시인 백석 (출처)

안녕하세요. <시가 있는 마을>의 유원상입니다.
이제 봄이 시작되었네요. 그런데, 이상기후 때문인지 여기 독일에는 폭설이 내렸습니다. 새싹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따스한 날씨가 기다려지네요. 오늘은 백석의 <남신의 주유동 박시봉방>이란 시를 여러분과 나눠보려 합니다.
남신의 주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디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가 조금 우울했죠?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가슴 징하게 울려오는 한 편의 시였습니다.
저 역시 이 시의 주인공처럼 마음 속에 깊숙히 담아둔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가슴이 매어오거나 나의 어리석음에 뜨거운 눈물이 핑 돌거나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싶네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그야말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을 생각할 때면, 나의 괴로움이 그저 내 어리석음의 당연한 결과겠거니 하고 쓴웃음을 짓곤 했죠.
아마도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적어도 한두번쯤은 있으시겠지요?
상처, 트라우마의 크고 작음은 있겠지만, 누구나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네요.

여러분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 잘 아실거에요. 산봉우리에 올라 그녀가 견우에게 외치는 말 유명하죠.
견우야~ 미안해.
나 정말 어쩔수가 없나봐.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어쩔수 없는 여잔가봐.
약혼까지 했던 사랑하던 남자친구를 잃었던 그녀. 
견우를 사랑하지만 죽은 옛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끝내 떨쳐 버리기 힘들었죠.

그런 아픔 가득한 그녀를 견우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죠.
아기처럼 자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제넘지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 싶다고...
그런데 뮙니까. 그녀의 아픔을 치유해 주기 위한 방법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랑하기에 헤어져야 하는 아픔. 아마 평생 잊기 힘든 아픔일 거에요.
그래서 어쩌면 견우와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가슴이 꽉 매어오거나 눈물이 핑 돌며,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쌔김질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와 슬픔은 참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은 그런 슬픔과 어리석음과 외로움에 한탄해 하다가도, 눈을 맞고 외로이 꿋꿋하게 서 있는 갈매나무를 바라봅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극심한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자신을 이끌어가는 더 크고 높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갈매나무를 통해 본 것이죠.

만약 그가 이 갈매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는 매우 싱거울 뻔 했습니다.
갈매나무를 갈매나무 답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꿋꿋하게 서 있도록 한 차디찬 눈보라 덕분이었죠.
마찬가지로 성공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와 슬픔, 과거의 실패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극도의 슬픔과 외로움에 있으시다면, 이 시의 주인공이 했던 것처럼 갈매나무 같은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어떨까요?
내 안의 보석을 바라본다면 그 어떠한 상처와 슬픔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도 슬픔을 이겨내기 힘드시다구요?
그러면 제가 같이 울어드리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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