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속에서

진정한 친구

예수님의 사랑 (출처: blog.daum.net/dw0179)


오늘은 세미나 발표 리허설로 분주한 하루였습니다. 몇몇 동료들이 슬라이드의 내용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서 내심 매우 감사했습니다. 사실 소프트웨어 사용 문제로 좀 이기적인 행동을 한 일이 있는 터라 동료들에게 어색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니 기분이 좋더군요. 

저녁에는 다른 연구소의 어느 친구도 중요한 세미나 발표가 예정되어 있어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점심도 먹지 못한 터라 피곤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발표 슬라이드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함께 고민하고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고 배는 고파와서 집에 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결국 끝까지 도와주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왜 내 발표내용은 검토해 주지 않나'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내 부끄러워지더군요. 그 친구가 오래 전 저의 연구문제에 대해서 장시간 동안 고민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
누가 네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가 주어라.
네게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아라.

진정한 친구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친구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까지 가주는 친구, 힘들어 할 때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제게 "진정한 친구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Give and Take" 식으로 사람을 대하였던 저의 이기적인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적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탓인지,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매우 힘들더군요. 우정을 나누는 것이 저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정한 친구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네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다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과연 오늘날의 세상에서 과연 지혜로운 행동일까요? 이를테면, 누가 내 오른뺨을 때릴 때 적어도 왼뺨은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누가 나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할 때 적어도 겉옷까지는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또 누가 내게 내 재산의 전부를 꾸어 달라고 할 때 적어도 패가망신할 정도는 되지 않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재산의 전부를 달라고 하는데 정말 예수님의 말씀처럼 다 주고 당장 거리에 쫓겨나 처자식들을 굶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또 알지도 못하는 건달에게 왼뺨까지 때리게 하여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치료비를 부담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뺨을 더 맞고, 겉옷까지 빼앗기며, 억지로 십 리를 가 주며,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장은 손해를 보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을 대적할 때 나는 내 것을 조금 더 보호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더욱 큰 것을 잃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어 버리고 내 마음에는 이기심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도 파괴 시킬 수 있는 위력적인 씨앗입니다. "일단 내 것부터 챙기고 보자"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20년대 백선행 집사님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평양의 과부였던 그녀가 전도를 받고 '주님! 정말 저는 예수님을 본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묘지를 이장하려고 어느 거간꾼으로부터 아주 좋은 땅이라고 소개받아 200냥을 들여 야산 하나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 산은 온통 돌짝밭이라 산소를 이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손해를 본 것이 다행이구만. 
다른 사람이 이런 땅을 사 놓고 마음을 많이 상했으면 어쩔뻔했노. 
마음만 상했겠나 판 사람을 걸어서 고소를 하고 난리를 치렀을는지도 모르지. 
그저 나 하나 마음 상했으니 그것으로 됐구먼.

동네에 "백 과부가 망했네"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들이 백집사의 산이 시멘트 제조에 필요한 석회석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1천냥에 산을 팔라고 그녀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손해 본 것만으로 족하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서야 그녀는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땅을 팔았습니다. 그녀가 받은 돈은 자그만치 2만냥이었습니다.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웃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려는 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웃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려는 것에 더하여 자신의 재산을 이웃과 나누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씨의 죽음이 온 국민들의 가슴을 애달프게 했습니다. 매달 7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도 매달 5만~10만원을 어린이재단에 기부하여 5명의 아이를 도왔던 그의 선행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기부액이 많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난하면서도 더욱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는 그의 모습에 온 국민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그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도 부자였지요. 크리스찬으로서 그의 선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손해를 보더라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줄 때 나는 물질적으로는 잃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영혼의 가난 만은 지키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곱절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저의 주변에 이처럼 아낌없이 주는 신앙의 선배들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러한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셨듯이, 또 주님께서 아름다운 이웃을 제게 보내주셨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상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행하시는 하나님  (0) 2011.10.07
주님을 뵙던 순간  (0) 2011.10.01
내 마음의 출애굽기  (1) 2011.09.29
기도에 응답받으려면  (0) 2011.09.26
가난의 기쁨을 소망하며  (0) 201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