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속에서

가난의 기쁨을 소망하며

지난 삶의 여정들과, 그리고 몇 년 안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시간들을 주욱 돌아보면, 삶이란 참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멀어지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시간의 역설'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무언가 열심히 살았지만 뒤돌아보면 결국 제자리, 아무리 목표를 향해 걸어도 더욱 멀어지는 것만 같은 목적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았던 시간들.

저의 20대는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순수한 꿈을 꾸던 어리숙한 어느 소년이 삶의 쓰디쓴 질고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물리학과 철학에 심취했지만, 오랫동안 잘못된 신앙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방탕했던 삶, 마음의 상처들... 예수님을 만난 저는 결국 인생의 출발선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그 과거의 시간들이 때론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 속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만은 있었음에 위안을 삼아 봅니다.

이제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된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그분 안에 있는 진리대로 가르침을 받았다면
옛날의 생활 방식, 곧 거짓된 욕망으로 부패해 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모습대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이 되십시오.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모습대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나의 모습을 보자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데, 조금도 새로 거듭난 사람 같지 않아.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되기는 커녕 옛 사람은 아직도 그대로 내게 남아 있어 죄 짓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지."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자고 결심해도,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입니다. 아침에 읽은 성경말씀이 점심이 되면 흐지부지해지고 저녁이 되면 먹고 즐기고 쾌락을 즐기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나마 하는 큐티, 기도와 성경 읽기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지요. 특히, 저는 기복이 심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때는 열심히 하다가도 슬럼프에 빠질 때는 모든 신앙생활들을 접어버리곤 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죄에 대한 민감성도 점점 사라지고 이런 생활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헤메이고, 왜 사는지도 모르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이미 오래 걸어 온 길
많이 걸어 왔다고 생각되는데
뒤돌아보면 나는
제자리
어느덧 해는 저물어 가고

다시 걸으면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또 다시 걸으면
가면 갈수록 갈 길은 더 
멀어만 지고

또다시 계속 걸으면
어딘지도 모르고 헤매는 길이고
왜인지도 모르고 가는 길이고
자꾸만 더 어딘지도 몰라지는데
되돌아 왔던 것인가

살아 있으니까 가야만 하는 길
가면 갈수록 헷갈리는 길
가까울수록 앞이 안 보이고
어느덧 해는 서쪽에 저물어 가는데
깨달음의 길은 더 아물거리기만 하고

태어났으니까 앞에 간 사람들을 따라
손발이 묶인 채 자신의 집행을 기다리는 파스칼의 사형수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뒤에 덮쳐오는 물결의 한낱 파도처럼
빠질 수도, 멈출 수도 없이 가는 길, 어디론지도, 어딘지도,
왜인지도 모르고 어디론가 가는, 아니 가야 하는 삶의 길

- 박이문의 "가면 갈수록 걸어가는 길" (출처: 계간 시대정신)

그리스도인의 길이 "축복과 영광의 길"이 아니라 "살아 있으니까 가야만 하는 길"이 된다면, 그것처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박이문의 표현대로 "손발이 묶인 채 자신의 집행을 기다리는 파스칼의 사형수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뒤에 덮쳐오는 물결의 한낱 파도처럼", 저는 욕망의 물결에 힘없이 휩쓸려 중심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목표를 향해 출발했던 나의 배는 이제 강한 폭풍에 맥없이 난파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참으로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쉽고 가벼운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8~30)

그런데, 왜 이리도 내겐 쉽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지... 하루종일 마귀의 공격들과 싸우느라 지칩니다. 얼마 싸우지도 않아 마귀에게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나면 또 다시 자책감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내 영혼은 그다지 쉼을 얻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 -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머리로는 압니다. 강한 믿음, 말씀에 대한 순종, 기도, 봉사와 헌신... 문제는 머리로는 아는데 내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적 식물인간'과 같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분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가 아무것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바쁘지만 공허한 생활의 연속...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순종하였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 속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껍데기만 있었지 알맹이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바로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 (출처: ewordunloaded.wordpress.com)


어떻게 하면 알맹이가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 방법 중의 하나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너는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하지 말아라. 남을 속여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계명들을 알고 있겠지?”
그러자 그는 “선생님, 저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라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정말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욱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나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백 배나 받고 아울러 핍박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앞선 사람이 뒤떨어지고 지금 뒤떨어졌다가도 앞서게 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가난'해지지 않고서 예수님을 참되게 따르기란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페이스북에 자신의 미래의 집을 예측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심심풀이로 해 보니, 골판지로 만든 다 쓰러져 가는 집이 나오더군요. 그것도 월세로! 그런데, 저는 왠지 그것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저의 모습이 연상되었으니까요. 성 프란체스코나 마더 테레사 수녀와 같은 분들도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철저히 가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을 본받아 저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난을 실천해 보려 합니다.

첫째, '욕망의 가난'입니다.
그것은 내 육체를 즐겁게 하려는 욕망(먹고 마시는 쾌락, 성욕 등)과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감정을 내 마음 속에서 버리는 일입니다. 저를 가장 괴롭히는 욕망 중의 하나는 바로 '정욕'입니다. 아무리 강한 믿음으로 정진할 때에도 성적 유혹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저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물론 그런 욕망들을 한 순간에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매일 집안을 치우고 쓸고 닦듯이, 내 마음도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시간의 가난'입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일들을 최대한 줄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제가 집중력이 대단한 줄 알지만 사실은 집중력이 매우 부족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한 가지 일에 10분 이상을 집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더군요. 이래저래 마음이 분산되다 보니, 일의 진척도 더디고 의욕도 사라지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속에는 온통 불안감, 두려움, 온갖 걱정들로 채워졌습니다. 잡념을 최대한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지낸다면, 삶이 단순해지고 마귀에 농락당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셋째, '말의 가난'입니다. 그것은 남을 저주하고 비난하는 말, 비관하고 절망하는 말 등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오직 감사의 말, 사랑의 말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채우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것을 '침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저는 말을 조금 더듬습니다. 말이 느릴 뿐만 아니라 말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온갖 군더더기 말로 뒤범벅이 되기 십상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하여 평온함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의 가난을 위하여, 테레사 수녀는 말을 줄이라고 권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날을 정하여 지키는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는 않겠지만, 말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가난을 통하여 저의 입을 감사의 말, 사랑의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채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이런 '가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無所有)"라는 책에서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불교의 '가난'과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불교의 '가난'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 반면,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역설적으로 '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채움이란 나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시도록 하는 것, 즉 나의 자아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해지기 위해서 그저 버리려는 노력만 한다면 불교의 수행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말씀과 성령으로 내 마음을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난'해지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의 '가난'은 성령의 '채움'을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비워지지 않은 잔에 포도주를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에 어떻게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의 잔은 탐욕과 악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 속의 욕망을 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불필요한 생각과 일들을 줄이고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단순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소서. 저의 입을 무겁게 하여 감사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채워주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소서.
 

'일상 속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의 출애굽기  (1) 2011.09.29
기도에 응답받으려면  (0) 2011.09.26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네  (0) 2011.05.07
평범한 목수이신 예수  (0) 2011.03.28
내 마음을 두드린 신비로운 음성  (0) 2011.03.14